[2류 국가, 2류 인재] ⑤석·박사 유학만 가고 싶고 실력은 안 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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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ii research
개인의 역량은 전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할 뿐
사회적 자본, 금융 자본의 지원 없이 혼자서 문을 뚫고 가는 것은 엄청난 도전
하고 싶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결과를 낼 수 있어야 받아주는 것

지난 글([2류 국가, 2류 인재] ④노동력의 역량과 지적 인프라의 역량이 낳는 시너지 효과)에 소개한 대로, SIAI 재학생 하나가 AI/Data Science/Statistics 주제로 석사 유학을 준비 중에 ‘지원자 에세이(Statement of Purpose, SOP)’ 쓰는 문제로 계속 지적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 말을 하기가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미 본인에게 여러 차례 했던 말이기도 하고, 아마 이대로 지원하면 ‘올-리젝(All Reject)’을 받을 것 같아 보인다.

올해 수능 시험이 ‘불수능’일만큼 어려워서 입시 전략을 짜기가 어려워졌다며 대치동 일대의 학원가에서는 1시간에 100만원짜리 고액 컨설팅이 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저 학생한테 그냥 유학원에 천만원 정도 주고 SOP 다시 써 달라고 그래라, 그 외에 다른 지원 관련 서류들을 최대한 포장해달라고 그래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도 저 학생이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학생이고, 이런 식으로 돈에 의탁해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차마 말을 못 꺼냈는데, 자존심의 문제,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 냉정하게 자본의 문제로 이 건을 바라보면, 유학원에 천만원을 내는게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Tier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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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박사 유학만 가고 싶고 실력은 안 되는 당신

나 역시 처음 유학 가겠다고 결심하고 이런 저런 준비하던 시절에 썼던 SOP를 내놓기 정말 부끄러운 수준이라,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시에 내가 봤던 속칭 ‘기름칠이 들어간’ SOP들은 정말 그 학생을 뽑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겠다 싶을만큼 잘 써 놨던 걸 봤었다.

한국처럼 수능 시험 점수에 따른 배치표로 대학을 가는 나라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되겠지만, 저 문화권으로 가면 에세이에 담긴 문장력, 인생 경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그 학생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한국 사람들은 유학가겠다고 하면 GRE, GMAT, LSAT 같은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여러번 시험을 치고, 한국에서 치뤄지지 않는 시험은 일본까지 찾아가서, 그것도 몇 번이나 찾아가서 시험을 친다. TOEFL 시험을 10번씩 치는 사람들도 많다. 근데, 시험 쳐 보면 알겠지만 학원에서 ‘쪽집게’ 문제로 점수 올릴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들이다.

적어도 내가 갔던 전공에서 PhD 입학 심사를 겪어보면 아무도 GRE의 Verbal 영역 점수를 쳐다보지 않았다. Math 영역에서 만점을 못 받았으면 뭐가 문제 있냐는 표현이 나왔던 기억이 있고, 그 외에는 그런 시험 점수보다 무슨 연구를 하고 싶어하는지가 잘 드러난 SOP와 그 학생의 역량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은 추천서가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좋은 학교로 갈수록 추천서를 써 준 교수 이름이 얼마나 명성이 뛰어나냐가 당락에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에서 대외 활동을 많이하는 실력없는 교수들, 연구에 손을 놓은 교수들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사람들 아무도 안 만나고 해외에 있는 동료들이랑 이메일, Zoom 콜만 하는 그런 교수들 추천서를 받아야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SIAI_Student_Application_20231213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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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다른 입시, 준비 안 된 당신

국내 대학의 연구에 손을 놓은 99.9%의 교수들과 더불어, 내 추천서도 이름 값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학생의 역량을 잘 담을 수 있는 사건을 녹여넣은 추천서가 되어야 입학사정관의 눈에 들 수 있을텐데, 나도 양심적인 사람인지라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보니 솔직히 겪은 사건들을 쓸 생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분들이 원하는게 뭔지 알고 있으니 대학원 공부를 하는데 필요한 직관적 인지 능력, 사고 역량 등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을 기록할 생각인데, 아마 저 유학원이라는 곳들은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엄청나게 화려한 사건들로 포장해 줄 가능성이 높다.

뭐가 중요한지, 어떻게 전략을 짜야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당신이 입시 준비에 고작 몇 달을 써서 그 격차를 다 따라잡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아니 수렴이고 뭐고, 그냥 0%다.

가까운 친구 중 하나는 미국 로스쿨 입시를 재수했는데, 두번째 지원에는 국제기구에 있는 친척이 SOP를 뜯어고쳐주고, 그 분의 소개로 뉴욕 시내에서 유명한 로펌에 있는 변호사들이 SOP를 한번 더 손을 봐 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디까지 고쳐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두번째 지원에는 그 친구의 역량에 걸맞는 유명 대학 로스쿨을 간 만큼, 가벼운 터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유학 중에 만났던 한국인들 상당수, 아니 거의 대다수가 부모님이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으셨거나, 아니면 매우 부잣집 자식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집안에서 지원이 있었거나, 유학원을 직·간접적으로 거치면서 SOP와 추천서가 더 영·미권 학자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지원이 없는데 천만원도 안 내고 그 격차를 따라 잡지 못하면, 결국 마음에 안 드는 대학을 가게 되거나, 더 최악의 경우에는 ‘All Reject’을 받게 된다.

SIAI_Student_Application_20231213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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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격차, 지적 역량의 격차, 사회적 자본의 격차

학부 1학년 때 맛보기로 들었던 ‘사회학의 이해’ 수업 수준의 조잡한 지식이기는 하지만,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격차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모든 걸 다 나 혼자서만 뚫어야 했는데, 주변에는 가족이 이미 그런 경험을 해서 문제를 쉽게 풀어줄 수 있거나, 가족의 지인이 그걸 도와줄 수 있는 물리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서 역시 문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냈는지 별로 언급 자체를 안 하더라. 본인이 쉽게 넘어섰으니 그 사회적 자본을 안 가진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해야했는지 이해가 안 됐나보다.

어린시절 즐겨봤던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한 구절 중에 서태웅이 윤대협과 1:1을 하루 종일 하고 난 다음에 ‘1:1로 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너는 팀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조언을 해 주는 대목이 있다.

둘을 결합하면, ‘사회적 자본’이 없는 사람은 ‘팀’이 없는 사람이고,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내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서는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수십 명의 네트워크가 수십 년간 쌓아올린 일을 단번에 따라잡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건 가끔 예외를 보기 때문에 가능성이 0%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혼자만의 능력으로 문 하나를 넘으려고 고집을 부리기 전에,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번은 따져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이번 시리즈 글에 계속 써 오고 있는 사고 프레임을 갖고 오면

  • $Y$ = $v \cdot H^{\alpha} \cdot K^{\beta} \cdot M^{\gamma}$

에서 $K$가 현격하게 낮은 이유가 사회적 자본에서 심각한 격차가 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걸 $M$의 역량으로 메워넣고, 엄청난 천재라면 본인의 역량 값인 $H$로 그 격차를 따라잡고 추월할 수 있겠지만, 그간의 경험상 그 추월에는 적지않은 시간이 걸린다. 예전에 서울과학고 자퇴한 영재의 도전 속에 숨겨진 선수학습과 입시교육 에 쓴 적이 있는 개인 경험담도 그렇고, 대전 K대 수석 졸업하고 유학 중에 만났던 서울과학고 출신 형님 한 분의 사정도 그랬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평등과 그들의 평등은 다르다

위의 기사 내용대로, 경쟁이 치열한 조직에 들어가서 싸워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렇게 밀고 들어가면서 누군가 더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인재가 그 조직에서 싸워볼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오직 $H$값에 의해서 본인의 인생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교육의 평등’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있는 선입견인데, 실상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는 부모님의 $K$와 $M$이 받쳐줘야 본인의 $H$가 빛을 발한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영·미권은 아예 대놓고 기부 입학을 받는 나라다. 양반 집안에 태어나도 과거에 급제해야 대접을 받는게 아니라, 귀족 집안에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심지어 자식까지 귀족이다. 말을 바꾸면, 본인이 $H$가 뛰어난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합계 값인 $Y$가 큰 것이 가장 중요했다. 최소한 한국 사회도 교육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을 벗어나면 역시 $H$가 아니라 $Y$가 중요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SIAI_Student_Application_20231213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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